빗속에 부른 노래 ‘내가 만일’
[한겨레] 안치환씨가 빗속에 서서 ‘내가 만일’을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
결을 따라 나는 8년 전 명동성당 앞으로 날아갔다. 1996년 여름, 뜨거운
햇볕, 쏟아지는 비와 싸워가며 우리는 농성을 하고 있었다. 외국인
연수제도가 실시된 뒤 두 해 동안 분노와 함께 그 폐해를 지켜본 결과는,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급히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연수제도를 폐지하고 외국인노동자
보호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외국인노동자 보호법’은
‘노동허가제’를 뼈대로 하여, 유엔의 ‘모든 이주 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지금보다도 더 완고했던 당시 한국사회는 ‘될 법이나 한 걸 요구하라’는
따가운 눈총을 쏟아낼 뿐이었다. 절실한 의지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싸늘한
시선에 지치고 고통스러웠다. 그해 여름엔 비가 많이도 내렸다. 우리는
비에 젖은 선전물을 앞에 두고 하염없이 앉아 있곤 했는데, 그때마다
방글라데시 노동자 오말파룩은 낮은 목소리로 ‘내가 만일’을 불렀다.
어느새 노래는 합창이 되곤 했다. 그 노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달래고
서로를 보듬었다. 애잔한 사랑노래였지만 어떤 투쟁가보다도 우리를 튼튼히
묶어주었고 우리는 그 덕에 힘겹던 농성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농성을 거치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주 노동자 문제를 ‘대한민국’이라는 협소한 틀 안에서만 싸워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계화 전략을 앞세운 자본은 가난한 나라에
깊이 침투하여 온 나라를 부수고 해체시키고 있다. 삶터에서 내쫓긴 가난한
민중이 살 길을 찾아 주변국으로 흘러들어가 가장 밑바닥에서 노동자
계급을 형성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주노동자 유입국 정부는
출입국제도와 노동정책을 강화하여 이들을 밀어내거나 더욱 활용하기
좋도록 억누르고 마름질했다. ‘대한민국’은 그 흐름 위에 놓여 있었다.
이주노동운동은 ‘대한민국’이라는 틀을 넘어서서 고민해야만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싸늘한 눈초리에 주눅들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해져야 했다.
그해 가을, 우리는 ‘아시아 이주노동자회의’를 서울에서 열었다. ‘세계
경제구조에 도전하는 이주노동자’라는 주제 아래 모인 아시아 각국의
이주노동자와 지원단체는 머리를 맞대고 ‘세계화’에 맞설 방안을
논의했다. 우리는 열띤 논쟁을 벌였고 공동 행동을 모색했다. 그렇게
준비한 투쟁이 ‘대한민국’ 담장을 넘나들며 십여 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새로운 제도,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새 제도는 각 이권집단의
악다구니가 배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주 노동자의 권리를 해치는
독소조항이 넘쳐났고, 기존 미등록 노동자에 대한 합법화 범위가 대폭
축소되어 애초 우리가 주장했던 ‘외국인노동자 보호법’과는 천양지차
다른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폐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연수제도가 정치권의 협상과정에서 살아남아 그 시퍼런 눈을 계속
부릅뜨고 있다. 아직 멀었다. 우리는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안치환씨는 다시 ‘내가
만일’을 들려준다. 마치 그 절실했던 첫마음을 잊지 말라는 듯이.
모든 나라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개발을 서두르고 이주 노동자를
이용할 뿐, 이주 노동자 그 자체는 안중에 없다. 이들을 보내는 나라와
받는 나라 모두 마찬가지다. 그 틈바구니에 낀 이주 노동자가 양쪽 발길에
차이며 사람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다시 화두를 꺼낸다. 맹목적인
경제개발만이 아니라 ‘이주 노동자의 권리를 포함하여 지속 가능한
개발’을 일궈야 한다고. 다음주에 아홉 번째 ‘아시아 이주노동자회의’가
다시 서울에서 열린다. 아시아의 지혜를 모은 이주노동운동은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될 것이다.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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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4-09-08 19: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