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현장에서> 매너가 너무 좋아서...(열린세상 14/2002.10) |
매너가 너무 좋아서 ......
석 원정
외국인 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영어를 우리들은 콩글리쉬라고 한다. 그런데 외국인노동자 상담을 하면서 콩글리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나라마다 영어의 발음이나 액센트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거기에 때로는 독특한 언어습관으로 인해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영어에 서투른 나 같은 사람에겐 그런 현상이 더 심해서 분명히 영어인데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처음 필리핀인들을 영어로 대하게 되었을 때, 나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필리핀인들은 미국사람보다 더 굴려서 발음을 하고, 액센트도 다르다. 여러 필리핀인들을 대하면서 간신히 미국식 영어와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그제서야 조금씩 알아듣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당황시키는 것은 그들의 발음이나 액센트만이 아니다.
필리핀남자들은 대체로 매너가 좋은 사람들이다. 한국남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들의 좋은 매너는 언어습관에서도 나타나는데, 필리핀 남자들 중 말끝에 항상 '예스 맘'이라고 덧붙여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스 맘'을 사용하는 여성 필리핀인들은 아직 보지 못했는데, 많은 남성 필리핀인들은 이 말을 사용하였다.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나를 당황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예스 맘'이라는 말을 유난히 자주 사용하는 필리핀남성들이 있었다. 제임스와 레이슨이라고 하는데, 임금체불 때문에 인권모임을 찾아왔었다. 그들은 영어를 잘 하는 상담원이 없을 때만 전화를 해서 결과적으로 나를 골탕먹이곤 했다.
그들은 전화를 하면 항상 예의바르게 'good afternoon'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곤 무어라고 빠른 영어로 말을 한다. 그러면 나는 'please'라는 말로 일단 그의 말을 중지시킨다. 그리고 천천히 한 문장씩 영어로 말을 한다. '다른 상담원을 기억하나요? 그녀가 당신들의 건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녀는 지금 없어요. 오늘은 그녀가 쉬는 날이에요.(혹은 외부에 일이 있어 나갔어요.) 난 당신들의 케이스에 대해 잘 모릅니다. 미안하지만 ( )요일에 다시 전화해주세요. 그때는 그녀가 있을 거예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찌나 예의바른지 내 말이 모두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예스 맘'이라고 꼭 토를 단다. 알아들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 버벅대는 나를 격려하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예스 맘'이라고 말을 할 때면 나는 그만 다음 문장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잠시 침묵. 다시 더듬더듬 다음 문장을 시작할라치면 이번엔 주어와 동사를 발음하자마자 '예스 맘'이 나온다. 나는 이번엔 보어와 목적어를 잊어버린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 문장을 마칠 때까지 '예스 맘'이라는 존칭을 서너 번은 듣게 된다. 즉 서너 번은 하고자 하는 말을 잊어먹고 더듬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짧은 문장들을 말이다. 속된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과정을 겪기를 몇 번. 나는 마침내 요령을 터득했다. '레이슨' 혹은 '제임스'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그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주르륵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해버린다. 쉬지도 않고. 그리고 마지막에 나도 예의바르게 반드시 'I'm sorry'를 덧붙인다. 그들은 '댕큐'라는 말로 나의 친절(?)에 답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그러면 나는 '무사통과'라는 생각에 안도하면서, 한편 이 예의바른 남자들에게 걸맞는 예의로 대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늘 기분이 언짢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좀더 친절하게, 많은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어 보지만 영어실력이 어디 그렇게 쉽게 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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