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생각해봅시다>좋은 말로는 안되는 세상(열린세상 14/2002.14) |
좋은 말로는 안 되는 세상
박 석운
노동인권회관 소장/전국민중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카톨릭의료원과 경희의료원 파업현장에 경찰병력이 투입되었다. 그간 사회 각계에서 경찰투입을 중단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위한 여건조성을 촉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경찰병력을 투입함으로써 장기 노사분쟁이 노정간의 대결국면으로 전화되었다. 가뜩이나 불편한 노정관계가 이제 더 이상 회복되기도 쉽지 않는 초긴장 관계로 돌입된 것이다.
사실 오늘로 114일째를 맞는 카톨릭중앙의료원과 경희의료원 등 보건의료노조파업은 잘못된 제도와 정부쪽의 편향적 개입이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장기화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양 당사자간에 핵심적으로 제기된 사학연금제도개선 등의 쟁점은 초기에 노사간에 진지하고 성실한 교섭만 진행되었더라면 다른 사업장에서 이룩된 합의수준으로 어렵지 않게 합의 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사용자측이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악법조항인 이른바 "직권중재"제도에만 의존하면서 불성실교섭으로만 일관한 것이 사태를 장기화시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중재에만 회부되면 그 순간부터 노조파업은 "불법"이 되는 상황에서는, 또 "불법파업"을 구실로 노조간부에게 체포영장 등을 발부받는 순간부터는, 노사간에 대등하고 성실한 교섭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쟁점이 파업기간 중 임금문제와 징계문제로까지 확대되면, 더욱더 풀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제도적 불법"을 양산하는 악법직권중재조항이 파업장기화와 사태악화의 첫번째 주범이다.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는 2번째 주범은 정부의 편향적 법집행태도이다. 파업노조지도부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무더기 체포영장발부로 대응하는 반면, 사용자측의 실정법위반에 대해서는 노조측의 고소고발이 빗발쳐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 경희의료원의 경우 무려 3차례에 걸쳐 파업중인 여성노조원들에 대해 무자비한 "구사대폭력"이 자행되어도, 폭력행사한 사용자측 구사대원들은 아무도 체포영장이 발부되지 않았다. 카톨릭중앙의료원에서도 사측의 명백한 노조탈퇴공작이 증거와 함께 확인되는데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있다.
한편 경찰투입 발표가 또 다른 주범이다. 정부당국이 관계부처 회의를 열고는 노사간에 대화로 해결 안되면 파업현장에 경찰을 투입하겠다 라고 발표하는 순간부터 성실교섭이나 대화를 통한 해결은 이미 물 건너가게 된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경찰투입을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원천봉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바라는 마음이었다면 경찰을 투입하지 않겠다 라고 발표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벌써 문제해결의 물꼬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정부당국은 장기파업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경찰을 투입하였지만, 경찰투입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과 대결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데 정부가 막가파식 "노동자 죽이기"로 나선 것이 이번 경찰투입만이 아니다. 최근 경제특구의 외자기업에서는 파견노동자도 무제한 사용하고 월차휴가나 생리휴가도 없게 하는 등 노동법을 무력화시키는 내용으로 일관된 경제특구법이 버젓이 입법예고되는가 하면,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된 사항조차도 후퇴시키면서 자본측의 요구를 "화끈하게" 수용한 주5일제 법안이 입법예고되었다. 이제 "대화와 타협", "당사자간의 이해조정" 등 노사정위원회류의 화장술조차 벗어 던지고 일방통행을 강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화장한, 그래서 유연한"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이제 "막가파식"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막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좋은 말로는 잘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이 글은 2002.9.13자 노동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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